내 연성

나는 왜 트론Tron을 파는 후조시가 되었나

평방미터 2016. 2. 3.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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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렇게 각잡고 앉아 생각해보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지만, 시작은 굉장히 단순했다. 2012년 지금도 상암에 위치한 <서울영상자료원>에서 나는 영화 <트론: 새로운 시작(이하 레거시), 2010>[x]을, 단순히 3DTV로 3D효과를 볼 수 있는 몇 안되는 블루레이라기에 보았고, 다프트펑크의 음악과 함께 그리드[x](Grid, 영화 속 세계관 내에서 프로그램이 존재하는 가상공간의 명칭)의 엄청난 빛 효과와, 동양인이 보면 당연히 코웃음 칠 만한 케빈 플린 aka (늙은) 제프 브리지스의 젠Zen드립과 함께 트론에 대해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솔직히 영화 스토리 자체는 무척이나 평범한 모험영화로, 줄거리는 대략 '남주의 잃어버린 (전 게임회사 CEO인) 아버지를 찾으러 가상세계로 들어가게된다'이다. 중간에 미모의 여주도, 여조도 등장하고 젊었을적 아버지와 똑닮은 악역도 등장한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내가 주목한 것은 주인공 샘 플린이 아버지가 남긴 오락실(이렇게 표현하니까 되게 추레하게 느껴지지만 어쨌든 오락실은 오락실이지) '플린 아케이드'의 트론Tron이라는 게임기 앞에서 비밀 통로를 발견하고 그대로 프로그램이 살아숨쉬는 가상공간, 뭐 <공각기동대>의 모토코 소령님이 말하는 '네트의 세계'와 흡사한 그리드로 들어가게되어 아버지를 찾고 그리드를 구하는 게 아니었다. 나는 그 이전, 샘의 아버지이자 CEO인 케빈 플린이 게임회사 엔콤Encom[x]을 내버려 둔 채로 홀연히 사라져 모든 일과 심지어 샘 플린 마저도 케빈의 친구이자 동업자인 알란 브래들리가 떠맡은 것에 묘한 흥미를 느꼈다. 알란은 꽤 책임감을 갖고 회사를 운영했지만, 위기가 닥쳐오고 - 딜린저와 딜린저 주니어에 대해서는 생략하도록 하겠다 거기까지가면 안돼 나 돌아올 수 없어 - 그와 동시에 이제는 적당히 컸다 하는 샘 플린의 망나니짓이 겹치는 영화 초반에 이미 촉이 왔기 때문이었다.

촉은 촉이었기 때문에 나는 레거시의 전편인 <트론(1982)>을 보기로 했다. 문제는 이 영화, 구할데가 마땅치가 않았다. 겨우 구해서 본 영화는 정말이지 '이럴수가 이것이 <스타 트렉> 이후의 영화란 말인가' 할 정도로 CGI효과도 요상했고 영화 흐름도 레거시의 긴장감과 화려한 볼거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또 촉이 왔다. 이 영화는 레거시와 마찬가지로 케빈 플린 역을 맡은 제프 브리지스(하지만 이때는 젊었지)와 알란 브래들리가 프로그램을 만들다가 우연한 기회에 케빈 플린이 그리드로 들어가게되고, 그가 알란이 만든 트론Tron이라는 프로그램을 도와 악당을 처치하고 문제를 해결한다는 내용이다.

앞에서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프로그램은 프로그램을 만든 유저를 닮는다. 따라서 트론은 알란 브래들리의 젊었을적 모습과 동일하다. 마찬가지로 레거시에서 등장하는 클루Clu는 젊었을적 케빈 플린의 얼굴과 같다. 설정상 트론은 클루에게 재프로그래밍 당해서 린즐러Rinzler가 되는데 영화속에서 그는 항상 헬멧을 착용하고 있다.

나는 클루가 케빈 플린을 배반하는 이유가 '완벽한 그리드를 위해 프로그래밍 되었기 때문에'라는 점에서 배덕함을, 샘 플린이 처음 클루와 만났을 때 젊었을 적 케빈 플린과 똑디닮은 그의 얼굴을 보며 'Father?'라고 묻는 장면에서 전율을, 그리고 결국 샘 플린을 돕는 린즐러 aka 트론을 보면서 모에함을, 마지막으로 샘의 뒤를 항상 봐주는 알란 브래들리를 보면서 역키잡을 꿈꿨던 것이다! 야 이만한 케미면 뭐가 없을래야 없을수가 없다구! 하면서 웹을 뒤졌지만...아무리 그래도 2010년 영화를(그것도 내용만 놓고보면 노잼인데) 파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한줄기 빛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AO3이어라. 최근 연성이라고 해봤자 2014년의 것이지만, 그래도 양웹에는 트론킨크밈도있고 AU썰, 떡썰, 단편중편장편까지 연성을 골라잡을수가 있었다. 아오삼의 웬만한 트론픽(그중에서도 샘/알란 이나 샘/트론 픽)은 내가 다 읽어봤다고 장담할 수 있다.

이런글을 쓰는 이유는 1)이거라도 쓰면 언젠가는 트론을 보고 검색을 해서 이 글을 읽고 낚이는 분들이 있지 않을까 해서 2)내가 올해 트론 책을 내려고 하기 때문에 라고 요약할 수 있다. 트론 좋아요 재미있어요 믿어줘요.

PS. 물론 복흑알란도 좋지마는 난 샘알란 역키잡이 그렇게 좋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