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아일랜드(+모스끄바) 여행

2019 아일랜드(+모스끄바) 여행 제1부(7월 13일)

평방미터 2020. 3. 24.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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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재기[각주:1]가 정말로 재기한 걸 두 눈으로 목격하고 난 이 시점에서 과연 아크투 섬에 갔다온 여행기를 쓰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었지만, 예전 유럽여행들 후기를 제대로 남기지 않았다가 동선만 겨우 알 수 있는 사진만 갖게되어서 그럴바에야 후기를 남기는게 낫겠다는 결론에 이르러 이렇게 여행기를 쓴다(현재 2020년 03월 23일).




단순히 '라제[각주:2] 촬영지에 가보고싶다!'는 마음과 더불어 아일랜드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보관되어있는 '켈스의 서'[각주:3]를 내 두 눈으로 보고싶다는 중세 캘리그라피 오따쿠의 욕망, 기네스 공장과 아이리시 위스키 공장 견학이라는 증류주 애호가의 흥미와 더불어 유럽의 외딴 섬나라(보통 아시아에서 유럽 여행을 하면 영국과 아일랜드는 섬이라서 잘 가지 않는다...)를 가는 길에 모스끄바에나 들르자는 생각으로 아일랜드(+모스끄바 경유) 여행을 가게 되었다. 가서 말 그대로 고생 깨나 했고, 나중에 다시 또 아일랜드에 가게 된다면 적어도 면허 따고나서 1년 후에 국제면허 장착하고 가야겠다는 생각이다.


최대한 여행 경비를 아끼면서도 어떻게 하면 러시아어 실전 체험을 해볼까 싶어서 아에로플로트(러시아 국영 항공사, 수화물 잃어버리거나 비행기가 추락하거나, 아니면 서비스가 불친절하기로 좀 유명하다) 항공편을 예약했는데 나한테는 아주 최적의 선택이었다; 이코노미석 좌석 간격도 이정도면 나쁘지 않았고 매 식사마다 흑빵хлеб이 나오는데 난 그게 그렇게 맛있더라.


새벽, 집 앞에서 공항 리무진을 타고 인천공항으로 가서 좀 헤매고 난 후 비행기를 탔다. 미리 환전해둔 루블이 좀 적은 거 같아서 공항에서 마저 바꿨는데, 혹시라도 러시아에 가는 사람이라면 한화에서 루블화로 바로 환전하지말고, 한화→미화로 바꿨다가 현지에서 미화를 다시 루블화로 바꾸기 바란다. 그게 더 환율을 잘 쳐준다고. 무튼 기내식 먹고 비행기 창문 좀 쳐다보고 잠들고 다시 또 기내식 먹고 창문 좀 보고 잠드는 열시간 정도의 일정이 끝나니 모스끄바 세례메쩨보 공항이었다.

 

모스끄바에는 총 3개의 국제공항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우선 가장 큰 도모도데보 공항, 그 다음이 두번째로 큰 세례메쩨보 공항, 그리고 마지막으로 브누코보 공항이다. 아에로플로트의 허브공항이 세례메쩨보 공항이었기 때문에, 난 그 공항에서 내렸는데 주홍색 글씨로 "세례메쩨보Шереметьево라고 쓰여진 간판이 참 예뻐서 아에로익스프레스(한국으로 치면 공항철도) 역에서 기다리는데 한참이고 쳐다보았다.


공항에서 시내 중심으로 가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국제면허도 없는데다 굳이 택시나 버스를 타고싶지 않았던 내 선택은 결국 아에로익스프레스였다. 혹시라도 모스끄바에 가려는 분들은, 아에로익스프레스 티켓을 앱으로 미리 구매하면 훨씬 저렴하니(현장에서는 편도에 1,000루블이지만 미리 구매하면 850루블 정도 한다. 이메일로 프로모션 코드를 받으면 500루블까지 저렴해지기도 하던) 꼭 미리 사두자. 세례메쩨보 국제공항에서 아에로익스프레스를 타고 가면 벨로루스끼 역에서 내리게 되는데, 벨로루스끼 역에 대한 내 첫인상은 '민트'였다.

 

 

러시아 기차역의 가장 특이하다고 생각하는 지점이 뭐냐면, 모스끄바→뻬쩨르부르그 운행하는 기차 노선의 모스끄바 출발 기차역 이름이 "레닌그라쯔끼(뻬쩨르부르그의 옛 이름) 역"이라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목적지 지명을 따서 역 이름을 짓는것인데, 그래서 목적지에 따라 역이 나뉜다. 한국인인 내가 보기엔 굉장히 비효율적이지만(아니 목적지마다 역이 나뉜다면 대체 몇 개나 역사를 지어야 하는건데?), 철도 노선은 일반도로처럼 마구 만들어낼 수 있는게 아닌데다가, 오래전(그러니까 19세기...레닌그라쯔끼 역은 1851년에 만들어졌다. 그때 한국은 조선 세도정치 시기로 안동 김씨가 다시 정권을 잡았을 때 였다)이라 철도 노선도 한두개 있으면 대단한거였을거라 생각한다.


아라사에 왔으면 아라사 교통카드를 써야 하지 않겠는가? 해서 뜨로이까тройка[각주:4]를 벨로루스끼 역 개찰구에서 샀다. 한국이 아닌 러시아에서, 러시아인 역무원을 대상으로 처음으로 러시아 말을 써서 그런지 긴장을 쫌 했는데, 아에로익스프레스와 연결된 역이라 그런지 무난하게 내 노어를 알아들으시던. 교통카드 금액은 50루블이고, 여기에 200루블 톱업(=충전)해서 샀다. 벨로루스끼 역에서 지하철을 타고(중간에 방향 잘못 타서 고생 좀 했다) 아호뜨니 랴드/쩨아뜨랄나야(모스끄바는 이름은 다르지만 연결된 역이 많다) 역에서 내렸다.

 

 

 

내리자마자 본 게 그 유명한 나찌오넬(내셔널) 호텔과 붉은 역사박물관 건물이었다. 새벽이라 열린 데가 거의 없어 헤매이다 옆에 있는 리츠칼튼호텔까지 흘러들어갔다. 여행하기 며칠 전에 어느 영론인 기자가 모스끄바의 리츠칼튼 야외테라스에서 끄렘린, 바실리성당, 그리고 역사박물관이 한번에 보이는 사진을 찍었고 그걸 본 나도 '저기한번 가봐야겠다'고 해서 위층의 라운지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고, 가서 현란한 노어 구사가 어렵겠다 싶어 영어로 물어봤는데(혹시 커피 한 잔 마실 수 있을까요?) 친절하게 그래도 된다고 해줘서 그렇구나 했다. 사실은 모스끄바 리츠칼튼호텔은 오전엔 호텔 숙박객들 대상으로 조식만 진행하고 외부인사는 들어가지 못하는거였는데...블랙커피값 계산하려고 했더니 무료로 제공한거라고 해서 엄청놀랐고, 비가오는데도 라운지의 야외테라스를 매니저가 안내해줘서 사진도 찍고 정말 고맙다고 답을 했더랬다. 이때부터였을까, 모스끄바에 대한 내 인상은 여행 내내 아주 좋게 남아있다.

 

 

 

하필 갔던 날이 장날이라 그런지, 바실리 성당 안으로 들어가는게 통제되어있었고 아호뜨니 랴드 근처에 경찰사관학도생들로 보이는 경찰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 비행기에서 내내 홍차를 마시고 리츠칼튼에서 진한 블랙커피까지 마셨는데도 아침 먹을 만한 적당한 곳이 없어서 발쇼이 극장 주변을 배회하다, 우연하게도 체홉 극장과(구 극장과 신 극장이 있었는데, 구 극장 건물에는 체홉의 "갈매기"를 상징하는 로고 동판이 정말로 붙어있었다!) 프로코피옢 박물관을 지나치게 되었다. 프로코피옢...여행을 갔다와서 본격적으로 그의 작품을 듣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박물관에 한번은 방문해볼 걸 이라는 후회가 든다. 각설하고, 근처 사거리 모퉁이에 있는 빵집 겸 카페 "Хлеб насущный"(몰랐는데 이게 한국식으로 번역하자면 '일용할 양식'이라는 뜻이 된다고 한다)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종업원 여자분이 추천하는 메뉴는 불란서식 크루아상과 구운 연어가 함께 나오는 메뉴였는데, 여기에 아쌈 홍차 한 주전자 시켜서 같이 먹었고 매우 맛있었다.

 

 

시간도 많아 다른데(예를들면 뜨레찌야꼽스까야 갈레레야 신관이라던가...) 갈 수도 있었는데 왜 발쇼이 극장 주변을 배회했냐면, 12시에 하는 "레이몬다" 발레 극을 예매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14시간밖에 머무르지 않는 도시의 가장 유명한 발레단 공연까지 보겠노라고(심지어 좀 쪽팔려서 집에다간 얘기도 안했다) 난리를 친거였다. 극장 앞 공원에서 유유자적 있다가 어떤 분이 길을 물어보기도 했다. 아무튼 열두시 한 삼십분 전에 발쇼이 극장을 정면으로 본 상태에서 좌측에 위치한 매표소에 가서 줄을 서고, 인터넷으로 미리 예매한 내용을 스마트폰으로 보여주면서 마찬가지로 노어로 프린트한 티켓을 달라고 요청했다. 발쇼이 극장은 입장하면서 종이로 인쇄한 티켓이 없으면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시간은 좀 걸렸지만 매표원분이 인쇄해서, 표지까지 끼워준 티켓을 들고 드디어 본 극장으로 들어가서 짐검사를 끝내고 들어갔다. 매우 아날로그적이면서도 디지털적이었던게, 인쇄된 티켓의 QR코드를 인식해서 들어갔고, 표검사를 하시는 분은 검사를 완료했단 뜻으로 종이 티켓의 귀퉁이를 살짝 찢으시던 점이었다.

 

자리로 올라가면서, 나이 지긋한 아주머님(할머님?)이 얇은 책자와 좀 두꺼워보이는 A5크기 정도의 칼라도록을 팔고계셨는데, 도록이 250루블이라(한화로는 대략 5,000원) 샀고 매우 만족스러웠다. 노문 페이지와 영문 페이지가 함께 있어서 굿굿! 복도에서 빈둥대면서 이리저리 살펴봤는데, 정장 안 입고 가면 어쩌나 했던 고민이 무색하게 관객들은 대부분 캐주얼 정장 차림이었다(물론 칵테일 드레스 입은 사람이 없진 않았다). 극은...뭐 말할것도 없이 훌륭했다; 발쇼이 극장의 무대는 관객석에서 더욱 잘 볼 수 있도록 앞으로 조금 기울어있는 상태라고 한다(스톨석도 앞을 향해 조금 기울어져있고). 그래서 무용수들이 특히나 대단해 보였다. 가장 감탄한것은 무대의상이었는데, 레이몬다 자체가 13세기 헝가리가 배경이라 동작이 큰 주연을 제외한 등장인물들의 의상이 전부 중세(네이버 중세 아님) 궁정의상이었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그리고 서양에서 흔히 보여주는 선:악=백인:유색인=서유럽:아시아 구도를 띄고 있는 미술이었다; 주인공 레이몬다와 그의 연인 기사는 서유럽 중세 궁정의상을, 안타고니스트로 등장하며 레이몬다와 결혼하려는 술탄은 중세 이슬람 의상을 입고 있었다. 심지어는 예전에었다면 분명 흑인 분장을 하고 등장했을 남녀 한 쌍의 무희도, 바디페인팅을 푸른색으로 해서 눈가리고 아웅 식이었다. 압도적이었던건, 헝가리 무곡 장면...정말로 입을 벌리고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2부였나 중반부 레이몬다의 꿈 속에서 무대 뒤 배경이 바뀌어서 '음 그렇군' 했는데 그게 사실은 반투명한 막을 설치한 거였고 그 어두운 부분을 조명이 딱 비추니 다수의 발레리나들이 등장해서 군무를 추던 장면도 최고였다. 러시아 발레가 유명한 이유가 있구나 싶었던 순간이었다. 쁘띠파는 천재야...

 

 

발쇼이 공연이 끝나고 다시 마녜쥐 광장으로 나온 나는, 그동안 진 치고 있던 경찰사관생도들이 사라진걸 발견하고 드디어 붉은광장으로 입성! 레닌묘는 오전에 줄을 서야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해서 가볍게 패스하고(=가볍진 않았다...이 내가 레닌묘를 못가다니!), 굼 백화점에 들르기로 했다. 굼 백화점은 우리가 보통 인식하고있는 백화점 건물이 아니라, 1960~70년대의 전형적인 아케이드 형식 건축으로 지어진 백화점이라 조금 색달랐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영화 <기생충>이 걸려있는 백화점 내 극장도 발견하고, 연어알 올린 블린도 먹고, 아이스크림도 먹었다. 나는 바닐라 아이스크림과 딸기 아이스크림을 먹었는데(대략 한화 4,000원), 특히 딸기아이스크림...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딸기향이 아니라 진짜 딸기맛이 나서(아니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모르겠네) 충격적이었다! 백화점 둘러보면서 아이스크림을 마저 먹고(로모노소프 매장 발견하고 진짜 눈돌아가서 코발트넷 사 말아 했는데, 결국 아호뜨니 랴드에서 개비싼 마뜨료슈까(한화 대략 24만원) 사는걸로 대신했다), 바실리 성당과 붉은 광장을 눈에 담은다음 다시 세례메쩨보 공항으로 가기 위해 공항철도를 탔다. 여기에서도 다시한번, 옆자리에 앉으신 친절한(?) 러시아 할머님이 잠든 날 깨워주셔서 무탈하게 공항에 내려 모스끄바-더블린 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더블린 국제 공항에 도착하고 수속 밟고, 짐이 나올때까지 기다리니(내가 가는 아일랜드 지역은 교통사정이 원활하지 않아 부득불 바퀴 달린 캐리어가 아니라 비슷한 크기의 하드 백팩을 메고 갔다...여행 내내 죽는줄알았다) 현지 시간으로 밤9시 정도(한국시간 새벽6시) 되었다. 보통 그정도라면 한국에서야 많이 늦은 저녁은 아니지만, 더블린은 전혀 아니었기 때문에 숙소로 가는 버스 티켓을 사는데 아주 많이 애를 먹었다. 사람 하나 없는 어둑어둑한 더블린 공항 밖에서, 어떻게든 구글 검색에 힘입어(스마트폰 구글 지도 없었으면 어땠을지 끔찍하다) 버스 정류장까지 찾아갈 수 있었고, 다행히 정류장에 버스 왕복권 자동판매기가 있어 그걸 끊었다. 원래는 아일랜드 교통카드인 Leap 카드를 만들어 충전하려고 했는데, 도통 카드 만드는 델 찾을수가 없었다...


도착한 숙소는 전형적인 도미토리 룸이었지만, 싸이파이 스럽게도 각 침대마다 네모나게 벌집처럼 나뉘어져 있는 구조라 있긴 편했다(물론 여행 중간에 카메라 플래시를 잘못 돌려 아래층 여자로부터 한번 욕들은 적은 있었는데..그다음날 새로 온 사람이랑 얘기하면서 험담했으니 되었다 하하!). 공동샤워실도 나쁘지 않은 수준이었고. 얼추 짐을 정리하고, 씻고, 내 예쁜 마뜨료슈까 인증샷도 찍고 결국 새벽이 되어서야 잠들었다.

  1. *스타워즈 에피소드 9: 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로 정정하고싶지 않다^^ [본문으로]
  2. Star Wars Episode 8: The Last Jedi, 흔히들 TLJ라 줄여 부른다. 감독 라이언 존슨의 역작. [본문으로]
  3. 전 세계적으로 중세 기독교 예술의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의 하나인 『켈스의 서(Book of Kells)』는 일반적으로 아일랜드의 역사가 남긴 가장 귀중한 보배로 간주된다. 서기 800년경에 제작된 이 책은 라틴어로 작성되었으며, 네 복음서와 예수의 전기, 그리고 몇몇 보충적인 텍스트가 들어 있다. 출처: 세계유네스코 홈페이지 [본문으로]
  4. 삼두마차라는 노어단어로, 러시아의 교통카드 이름이다. 영국에 오이스터가, 일본에 스이카가 있다면 러시아에는 뜨로이까가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