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런던여행

2016 런던여행 제1부(6월 21일~23일)

평방미터 2016. 7. 3.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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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차적응하느라 일찍일어난 김에 여행후기를 써본다.

인생은 어떻게 흘러갈지 모른다.

작년 11월 즈음에 케네스 브래너가 감독하고 옵빠가 나오는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 65파운드짜리 티켓을 결제할 때만 해도 '이번에는 지난번보다 더 여유롭게 갈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륙에서 불어온 거대한 바람, 랑야방과 위장자가 날 치고 지나갔고 많은 우여곡절끝에 영국여행경비의 상당부분을 랑야방 여행을 하는데 써버렸다. 거기에 갔던게 후회가 되진 않는데, 그래도 확실히 그 여행사를 통하지 않고 갔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는 여전하다. 그 돈이면 브라이튼도 캠브릿지도 리버풀도 갔을텐데!

아무튼 그렇게 대폭 줄인 경비를 이리저리 활용하느라 누군가의 고함과 눈물과 클릭질이 필요했다. 준비에 대한건 너무 길어서 각설하고 짧게 적어보자면, 히드로-인천 아시아나 직항 티켓을 90만원도 안되는 금액에 잡았는데 마침 결제조건이 걸린 해당 카드값을 지난달에 못막는 바람에 눈물을 머금고 떠나보냈다. 대신에 수화물 잃어버리기로 유명하고 극악의 기내식을 자랑한다는 히드로-북경-인천(김포) 에어차이나 경유 티켓을 80만원에 결제했다. 숙박도 원래는 레지던스를 생각했었는데, 마찬가지로 줄이고 줄여서 스위스 코티지 역 부근에 있는 팔머스 롯지Palmers Lodge 도미토리룸에 묵었다. 짐을 싸거나 상비약을 챙기거나 그런것들은 생략한다.


6월 21일 화요일(1일)

전날 저녁에 짐챙기느라 늦게 잤는데도 여행에 대한 기대감 때문인지 오전9시 정도에 일어났다. 씻고 마지막으로 짐을 다시 점검하고 바로 근처 지하철로 갔다. 에어차이나는 이코노미 기준 위탁수하물은 1개 23kg, 기내수하물은 1개 5kg 제한이 있었는데, 나는 6kg 정도인 캐리어를 위탁수하물로 부치고 크로스백 하나에 노트북과 기내에서 읽을 책들과 기타등등 필요한 물품만을 챙겼다. 사실은 에어차이나 후기를 읽을때마다 수하물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아서 캐리어도 기내수하물로 가져가려고 5kg미만으로 맞추려고 오만 노력을 다 했는데(기초화장품을 비롯한 모든 액체류를 100ml씩 최대 1L로 소분해 비닐팩에 넣어두었다), 결국 5kg이 넘어가서 포기하고 위탁수하물로 부쳐버리기로 했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 공항철도로 환승해 인천국제공항에 내렸다. 평소 홍대갈때마다 공항철도를 타서 모르고 그 방향으로 탈 뻔 하기도. 어쩐지 사람이 많다 싶었다.

아침을 먹지 않고 바로 공항으로 가서, 근처에서 뭘 먹으려고 두리번 거리다가 마침 오므라이스 가게가 있길래 들어가서 토마토 오므라이스를 먹었다. 계란과 토마토, 절대 실패할 수 없는 음식이지!

밥을 먹고 마저 수속하는 장소로 가려고 하는데, '여객터미널'이라고만 되어있길래 길을 잘못들었나? 싶었는데 비행기 픽토그램이 같이 그려져 있어서 공항도 마찬가지로 여객터미널이라고 하나보다 하고 그대로 갔다. 길은 역시 맞았고, 3층이 출국장이라길래 올라갔다. 에어차이나는 H19~30이 수속 구간이라 그곳에서 줄을 서서 창구로 가 승무원에게 보딩패스를 받고 짐을 부치고 들어갔다. 짐을 부치는데 오만 생각이 다 들었는데 '과연 캐리어를 히드로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ㅠㅠ'하는 표정을 내가 짓고있어서 그랬는지 승무원이 잘 안내해주었다.

보딩패스 받자마자 그냥 수속밟고 들어갔다. 뭐 딱히 할 일도 없었고, 미리 주문한 면세품도 챙겨야 했기 때문에. 짐 검사를 하고(노트북과 휴대폰, 배터리 꺼낼때마다 참 이래저래 힘이들었다. 사실 이번 여행에 노트북은 거의 쓰질 않았는데 괜히 가져가서 짐이었나 싶기도 했다), 여권과 보딩패스를 보여주고 면세구역으로 들어갔다.

신라면세점을 이용하는 에어차이나 승객의 경우에는, 3층 122번 게이트 앞에서 받으면 된다길래, 거기가 어디지 했는데 101~132번 게이트는 아래층에 있어서 셔틀트레인을 타고 가야 했었다. 면세구역에 내려서 셔틀트레인을 타고 움직이는건 또 처음이라 신기했다. 셔틀트레인은 좁고 덜컹거리고 습기가 꽉 차있어서 무섭긴 했지만.

면세품을 일단 받으러 줄을 서는데, 뒤에서 엄청 키 큰 여성분이 나한테 말을 거는데 아직 중국어 기초 회화 배우는 중인 나라 무슨말인지 몰라서 sorry 하고 얼버무렸다. 생각해보니 이게 면세품 줄이에요? 중국어 할 줄 아세요? 뭐 그런 말이었던것같다. 어쩐지 나 짐검사 할때도 검사원이 나한테 电脑? 이러던데 나 좀 중국인 같은 관상인걸까 신기했다.

이래저래 둘러보다가 화장품 판매 구역에서 디올 매장 발견하고 들어갔는데, 마침 사려던 아이섀도 5구가 있길래 보다가 물어보니 한화나 달러는 받는데 파운드는 받지 않는단 말에 맥이 탁 풀려서 그냥 돌아갔다. 가진 돈의 거의 전부를 파운드로 환전해버린 데다가 카드는 정말 비상용! 일때만 써야하는거라 어쩔수가 없었다. 안녕 디올5구...슬픈 마음을 청포도주스로 달랬다. 맛있어!

비행기 시간이 얼추 다가오고 113번 게이트로 들어갔다. 보딩패스를 끊을때 승무원에게 인천-북경으로 가는 비행기 좌석은 복도로 잡고, 북경-런던으로 가는 비행기 좌석은 창가 좌석으로 잡아달라 말했었기 때문에 복도 자리에 앉았다.

생각외로 기내식은 무척 좋았다. 기내에서 휴대폰을 쓰질 못해서 사진은 못찍었는데, 호일에 싸여진 닭고기 덮밥과 소고기 볶음면이 나왔다. 나는 닭고기 덮밥을 먹음! 어차피 기내식은 거기에서 거기기도 하고, 나는 고추장과 김치가 없으면 살지 못하는 한국인은 아니기 때문에 맛있게 잘 먹었다. 후기를 읽어보면 의자에 사용감이 심하고, 담요도 머리카락이 붙어있고 그런얘기가 많았는데 그러진 않았다. 노트북을 하려다가 어차피 2시간도 안되는 비행시간에, 밥도 먹었으니 그냥 책을 읽는게 낫겠다 싶어서 랑야방 가제본 책을 읽었다. 내 옆옆에 유럽인 여자도 탔는데, 옆사람이랑 이야기하면서 차이나타임 어쩌구하기도 하더란. 옆자리에 앉은 아저씨가 기내 모니터로 갓집트를 보는데 호루스의 눈 나오고 세트가 변신합체! 하는 장면이 뙇 하고 나와서 너무 웃겼다.

북경은 전체적으로 더웠다. 북경국제공항에 도착해 보니 예상시간보다 50분 연착이 되어서 깜짝 놀랐다. 경유 시간을 2시간 5분으로 짧게 잡은터라 급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 국제경유international transfer 창구에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그곳으로 쌩 달려가 여권 검사를 마치고 짐 검사를 하고 나와 이것저것 둘러보다 E51번 게이트로 움직였다. 내가 인천에서 받은 보딩패스에는 북경-히드로 게이트가 쓰여있지 않았는데, 승무원이 이건 북경에서 확인해 들어가면 된다고 말해줬기 때문에 전광판을 보고 E51번으로 갔다.

E51번 게이트도 꽤 멀리 떨어져 있어서, 이리저리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들어갔다. 사람들이 아주 많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미국인이 대부분이라 좀 의아하긴 했었다. 런던가는 미국인이 이렇게 많나? 휴가철인가 그런갑다 했다. 미국인들은 굉장히 시끄러웠는데, 해맑은 제1세계 인간들이라 그런지 자기들끼리 모여있어서 두들겨 맞지 않을테니까 그런지 몰라도 약간 인종차별적인 발언도 했다. 

그런데 보딩타임이 13:55분이었는데도 아무도 들어가질 않아서 의아했다. 14:15분까지 기다렸는데 내가 알고있기로는 내가 타는 북경발 히드로행 비행기는 14:25분에 출발하는데...혹시나 싶어서 근처 직원에게 영어로 물어보니 전광판을 가리키며 그 비행기는 E53이 아니라 E51이라는 거였다. 막판에 게이트가 바뀐 셈! 어쩐지 아까 몇 명의 사람들이 그쪽으로 돌아가더니ㅠㅠ식겁해서 허둥지둥 E53으로 향했다. 직원이 런던? 이라고 묻길래 고개를 끄덕이며 보딩패스를 보여주었고, 급하게 작은 버스에 탔다. 보니까 버스에 타서 비행기까지 가는모양이었다.

나처럼 게이트를 나중에 고지받은 사람이 몇 있었는지 사람을 마저 태우고 버스가 출발했는데, 한국인들이었다. 20대 초반 남자들이었는데,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차별발언을 내뱉어서 당황했다. 한국어로 하면 정말로 모를것 같나? 이후 여행다니면서 이래저래 만난 한국인들에 대한 인상 때문에, 나는 여행하는 내내 트친님들을 만날 때나 외국인이 국적을 물어볼때만 제외하고 일본인이나 중국인인 척 했다.

어렵사리 비행기에 올라 자리를 잡았는데, 옆에 40대 한국인 남자가 앉았다. 안돼...10시간 넘는 비행시간동안 불편하진 않았지만, 옆사람이 한국어로 멍청한 소리 하는걸 계속 듣고있자니 귀에서 쥐가 날 것 같았다. 압권은 콩코드기 얘기였는데, 비행기 모니터에 시속 600km로 간다고 쓰여있으니까 '왜 콩코드기가 발명되었는데 이렇게 느리게 가는거지?' 같은 질문을 옆사람에게 하는거였다. 바보야 돈이 안되잖아 돈이...너같으면 만원 써서 10만원 벌래, 천원 써서 10만원 벌래? 불가피하게 기내용 헤드폰으로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랑야방 가제본을 마저 읽었다.

두 번 나온 기내식도 꽤 맛있었는데, 두번째에는 면을 선택했더니 면이 잔뜩 불어있었다. 역시 기내식에서 면은 피하는것으로...대신에 오렌지 주스, 사과 주스, 차도 마시고.

화장실, 화장실을 딱 한번 갔는데 에어차이나 후기에서도 화장실이 언급된 적이 많더니 역시나 그랬다. 화장실 냄새는 둘째치고 더러웠다. 세면대 수압도 너무 쎄서 손을 씻으려고 물을 틀었다가 샤워를 해야 할 판이었다. 이후 기내 화장실은 아예 들르질 않았다.

에어차이나 후기를 또 읽다보면, 아재들이 '승무원들이 웃질 않아 무섭다'이런 소리 써둔게 많은데, 난 오히려 그게 좋았다. 국적기 특히 여성승무원들의 과도한 친절(입에 쥐나게 웃기, 무릎꿇고 승객이 하는 말 들어야하기 같은 끔찍한 과잉감정노동들)은 내가 보기에도 너무 불편하다. 중국어 자체가 딱딱 끊어 말하는게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물어보는거에 잘 답해 주었고 나는 그점에 있어서는 정말 만족했다.

거의 다 도착했을때 창문을 열고 바깥을 보니 오후 여덟시 반 쯤 이었는데도 날이 밝고 날씨가 좋아 런던 시내가 한데 다 보였다. 제일 처음 알아본 건물은 거킨이었는데, 녀석이 처음 만들어졌을때만 해도 스카이라인을 망치는 주범이라 욕을 엄청 먹었던걸 생각해보면ㅋㅋ그 다음에 샤드, 이제는 샤드가 욕을 제일 많이 먹어서 거킨이 덜 먹는것 같다. 순서대로 타워브릿지, 런던아이, 그리고 세인트폴 성당을 보았다. 입국심사할때 내야 할 종이에 영국 거주지도 적어야 했는데, 수첩에 잘 적어놓고 적어놓지 않은 줄 알아서 급하게 하루만 로밍한 휴대폰으로 검색해 찾아서 적었다.

영국/EU 여권과 그 외의 나라 구분한 표시를 보면서, 아직은 영국이 EU네 앞으로도 그렇겠지, 라고 생각했던 나ㅠㅠ

도착한 시간은 예상시간과 거의 같았는데, 입국 수속이 너무 오래 걸렸다. 듣기로는 아랍계와 중국인들일수록 심사가 더 오래걸린다고 했다. 내가 탄 비행기가 에어차이나라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기다려 심사원 앞에 섰는데, 예전에는 백발성성한 백인 노인 심사원이었는데, 이번에는 아랍계 중년 남자 심사원이었다. 어디서 왔는가? 뭐하러 왔는가? 이전에도 온 적이 있는가? 직업이 뭔가? 같은 질문에 적당히 대답했는데, 내가 관광이랑 하원 투어때문에 왔다고 한 다음에 학생인지, 전공이 무언지 묻길래 폴리틱스! 라고 대답하자마자 한 3초간 날 쳐다보더니 도장 쾅 찍고 입국 승인받았다...23일 브렉시트 때문에 그런건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히드로 입국심사할때도 정치학 전공 질문 받고 바로 승인받았는데 기분이 참 묘했다.

설마 내 짐 왔을까 라고 생각하며 짐 찾는 곳으로 갔는데, 다행히 짐이 와 있었다! 신나하며 시간을 보니 22:30...지하철을 타는 대신 히드로 익스프레스를 타기로 했다. 그런데 히드로 익스프레스를 타려고 긴 긴 거리를 캐리어 끌고 이동했더니, 기계에서는 카드만 받는다고 쓰여있질 않은가...창구직원에게 물어보려고 했는데 마침 다급해 보이는 누군가와 얘길하고 있어서 물어보기도 애매했다. 어쩔수없이 갖고 온 체크카드를 긁어서 편도만 끊었다.

23시 15분...런던 패딩턴 역에 드디어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기계에서 오이스터 카드 구입하고, 트래블카드 7일권 탑업하고 20파운드 탑업했다. 다른건 몰라도 교통비만큼은 부족하지않게 끊어야겠단 생각에 넉넉하게 끊었다.

패딩턴에서 스위스코티지까지는 그렇게 멀진 않았는데, 간만에 튜브를 타서 그런지 좀 많이 돌아갔다. 패딩턴-에지웨어로드-베이커스트리트-스위스코티지 순으로 타서 1번출구에 내려 팔머스 롯지까지 걸어갔다. 밤이었는데도 딱히 무섭진 않았는데, 정말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팔머스 롯지의 체크인 시간은 딱히 제한이 없어서 가자마자 여권 보여주니깐 오케이 하고 카드키 받고 도미토리룸 6인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내 침대가 3층침대 3층이었고. 좀 당황하긴 했지만 어차피 같은 방 1층 침대는 전부 다른사람들이 사용하고 있어서 어쩔수 없겠다 싶어 공동욕실가서 샤워하고 머리도 감고 말리고 혹시나 싶어 감기약도 먹고 잤다. 이렇게 런던에서의 1일은 끝!


6월 22일 수요일(제2일)

숙소 창문에서 본 풍경.

깨고보니 새벽4시 30분. 잠을 제대로 못잤나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비행기에서 틈틈이 자서 그런것같았다. 침대에서 적당히 뒹굴대다가 5시에 그냥 일어나서 씻고 옷입고 4.50파운드에 조식을 먹으러 갔다. 양은 무제한이었는데 크로와상과 머핀, 삶은계란과 콘푸로스트 그리고 우유(저지방 우유와 일반 우유가 있었다), 두 가지 종류의 토스트(옆에 굽는 기계가 있어서 구워먹을 수 있었다), 위에 얹어먹는 햄과 치즈 그리고 영국 사과가 있었다. 사과! 푸른색 아오리였는데 정말 작았다. 한개 집어와서 깨물어 먹었는데 맛은 그냥 아오리 사과였다. 하지만 너무 깜찍했다. 밥먹는데 아침 비비씨 뉴스에서 레퍼렌덤 얘기 계속 나오고, 조 콕스 이야기와 이베트 아이들 살해협박한 미친놈 얘기가 뉴스에 나왔다. 보리스도 잠깐 얼굴을 비췄는데, 매번 모니터로만 보던 얼굴을 TV에서 보니까 더 신기했다.

사실 이번 여행의 최대 목적은 옵빠가 나오는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고 스테이지 도어에서 옵빠를 만나는 것이었기 때문에, 아침이라 날씨도 괜찮아서 옵빠 집이 있다는 프림로즈힐에 가기로 했다. 프림로즈힐은 햄스테드 근처의 큰 언덕 공원인데, 워낙 런던이 평지라 날씨만 좋으면 여기에서 런던의 주요 명소들이 한 눈에 보인다. 근처 캠든타운으로 먼저 가, 심카드를 사고 프림로즈 힐로 가려고 했는데 캠든타운에 가니 심카드 판매하는 O2나 EE가 문을 아직 열지 않을 때라(너무 일찍이었나 보다) 프림로즈 힐을 그냥 가기로 했다. 가는 중간에 버스가 종점이라 내려버려 걸어가기도 하고 아무튼 자꾸 삽질을 했다. 가는 동안에 여러 집들과 가게들 창문을 보는데, 어느 집에는 영국 국기와 EU국기를 함께 창문에 붙여두고 있었는데 그 윗집은 탈퇴지지인 모양인것 같았다. 어느 가게에는 VOTE REMAIN이라는 표어를 창문에 붙여두기도 했다. 23일, 그러니까 내일이 투표일이라는게 다시한번 실감이 났다.

하필 언덕을 올라가는데 비가 슬쩍 내려서, 아 이게 뭐야 하고 올라갔더니 역시나 날이 흐려 멀리까지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정말 화요일 아침인데도 개산책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그림같이 생긴 하얀색 요크셔테리어와, 아프간하운드, 닥스훈트, 골든리트리버에서부터 아주 깔끔하게 미용한 포메라니안(이 녀석은 목줄도 매지 않았는데 주인을 졸졸 잘 쫒아가다가 나와 눈이 뙇 마주쳤는데, 그 이후로 자꾸 나를 힐금힐금 쳐다보며 마저 주인을 따라갔다)을 보았다. 언덕에서는 방금전까지 무슨 촬영이라도 했는지 촬영기사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는데 별 상관은 안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와중에 집업후드를 껴입고 런던 시내를 둘러보다가 다시 캠든타운으로 향했다. 도착해서 EE매장에 들러 심카드를 사고싶다고 하니깐, 뭔가 곰 발루같은 아저씨가 나와서 옵션은 이러이러한게 있대서 4G(한국으로 치면 LTE이려나?), 데이터는 4GB에 전화 몇 시간과 문자 무제한인 버전을 25파운드에 구매했다. 한달에 4~5GB는 거뜬히 쓰는 나라서 10일 영국이면 구글 지도 보는데 그정도는 충분히 쓰겠다 싶었는데 이 역시 마지막까지 알뜰하게 썼으니 꽤 잘한 선택인 셈이었다.

심카드 사는데 아저씨가 어디서 왔냐고 그러길래 싸우스코리아요 하니깐 런던이랑 싸우스코리아 중에서 어디가 좋냐고 물어봤다. 아마 레퍼렌덤 때문에 그런걸 물어본게 아닐까 싶었다.

이제 심카드도 샀겠다, 근처 막스앤스펜서 가서 밀딜로 물, 과일, 샌드위치를 사서 일단 트라팔가 광장 쪽으로 갔다. 아직은 배가 고프지 않아, 그대로 내셔널갤러리로 들어가 4년전에 고흐 그림을 보았던 근대 전시관으로 향하니 슬프게도 고흐는 다 빠져 있었다. 모네랑 까미유 피사로, 쇠라의 작품이 전시되있었는데 생각보다 좋았다. 특히 모네의 아침 건초더미와 피사로의 비오는날 아침의 불레바드 회화 작품이 압권이었다. 아쉽게도 사진은 찍지 못하는 작품이라 열심히 눈으로 보기만 했다.

나는 특히 모네의 물결 표현이 좋은데, 슥슥 칠한것 같아 보이지만 물결이 움직이는걸 완벽하게 잡아냈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운 작품이라 기프트샵에서 모네의 그림엽서 두 개를 샀다. 하나는 사진의 이 작품이고, 다른 하나는 웨스트민스터를 그린 작품이었는데 후자는 런던여행 마지막날에 한국으로 부쳤다.

양털=후리스라는거에 충격먹어서 사진찍었다. 사진은 이아손과 메데이아...그렇죠 황금 양털 얘기다.

새로 대여해 들여온 전시물은 이렇게 옆에 New Loan이라 쓰여져있다. 매번 전시물이 바뀌니 언제 와도 좋은 셈이다. 내셔널갤러리는 워낙 커서 예전에는 근대 전시물만 보았는데, 다른 시대 전시물들도 얼추 둘러보다가 점심시간이 되어 밖으로 나왔다. 트라팔가 광장 벤치에 앉아 전에 사온 샌드위치를 먹고 물은 홈오피스 보틀에 담아 둔걸로 마셨다. 설치된 무대에서 빌 나이가 연설을 하고 있었는데, 프라이드 행사인가? 싶었다.

샌드위치는 치킨&아보카도였는데, 치킨에서 후추맛이 좀 나는거 빼고는 정말 맛있었다. 내가 뭘 먹고 있다는걸 비둘기들이 안 모양인지 자꾸 다가오는데 애잔해서 발로 슉슉 하지도 못하고 에구 그래 너나 나나 하지만 넌 제1세계 비둘기란다 하고 그랬다.

사실 이번 여행에서 제일 고려 안한게 맛투어였는데...런던에서 맛있는걸 먹으려면 어느정도 돈을 들여야 하는게 사실이고 내게는 옵빠 연극이라는 원대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밥은 그냥 배를 적당히 채우는 데 만족했다. 그리고 마트 가면 밀딜meal deal 이라고 해서 샌드위치(혹은 샐러드)+과일(혹은 과자)+물(혹은 주스 등)을 3파운드 정도에 구매할 수 있다. 이걸로 사면 돈이 꽤 절약이 되어서 이걸 자주 이용했다.

다 먹고 내가 런던에서 제일 좋아하는 미술관인 내셔널포트레이트 갤러리, 국립초상화미술관으로 갔다. 랜덤으로 짐을 검사하는데, 내가 걸려서 가방을 딱 열었더니 하필 나랑 함께 여행하는 핀 인형이 보였다. 솔직히 좀 많이 쪽팔렸는데 직원이 '핀 더 휴먼?' 이러면서 너의 베스트 프렌드야? 라고 묻길래 그렇다고 웃으며 답해줬다. 가방 잠그려고 하니깐 핀 배를 토닥여줬음ㅋㅋ 아무튼 그렇게 신나서 예전에도 좋아하며 봤던 튜더 시대 초상화도 보고 그랬다. 특별전시는 매주 목요일마다 4파운드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러시아 미술 특별전시는 다음에 와서 보자고 마음먹었는데 26일까지 라는걸 까먹어서 결국 보질못했다ㅜㅜ

14:30에 트라팔가 광장 근처에 있는 The Playhouse 극장서 하는 <1984>극을 예매해 놔서, 시간 맞춰 가 박스오피스에서 티켓 받고 휴대품보관소에 가방 맡기고 연극을 보았다. 근데 이럴수가...학생 단체관람이 있어서 내 앞줄 뒷줄이 전부 학생들이었다. 난 스톨석 C열이었는데, 앞에는 사복입은 학생들이었고 뒤에는 교복입은 학생들이었다. 공연매너가 그렇게 안좋을수가 없었다. 극은 예고한대로, 섬광이 번쩍거리기도 하고 총성이 들리고 극중 피가 나는걸 묘사하기도 했는데 그런 진지한 장면에서 애들이 킬킬대는 바람에 몰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얼마나 공연 매너가 좋지 않았으면 내 앞에 앉은 커플 중 남자가 앞의 학생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지적할 정도였다.

나는 이 극을 닥터후에서 제니로 나오는 카트린 스튜어트(1984에서는 줄리아 역) 때문에 본 거였는데, 배우들의 연기도 괜찮았고 무대 연출이나 효과도 뛰어났다. 특히 무대 디자인이 정말 뛰어났다(사진은 프로그램북에 나와있는 무대 그림이다). 교실같았다가, 도서관 같기도, 중고서점이 되었다가 식당이 되기도 했다. 극중 윈스턴이 어느게 진실이고 어느게 거짓인지 과연 진실이란게 존재하는건지 혼란스러워 하는 내면을 무대로 잘 표현해낸것 같았고 결말로 치달을수록 끔찍한 어떤 사실을 깨닫게 되는 인물의 모습과 함께 이 무대가 해체되는 장면이 돋보였다. 

<1984> 내 별점: ★★★☆

아무튼 연극을 그렇게 보고 나와서 다시 트라팔가 광장으로 갔는데, 연극 보기전에 했던 무언가를 계속 하고 있었고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어서 보니 프라이드 행사가 아니라 조 콕스 추모 행사였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같이 광장에 서서 무대에 나온 사람들의 얘기를 듣는데, 물론 이상한 소리 하는 사람도 없진 않았지만 다들 하나같이 그렇게 있다는게 신기했다. 무대에 있는 누군가가 옆사람의 손을 잡고 높이 들어올리자고 해서 나도 옆에 있던 일면식도 안한 사람들의 손을 잡고 높이 들어올렸다. 나중에 보니까 내 머리가 살짝 사진에 찍혔는데 마음이 좀 그랬다. 수도 한복판의 광장에서 죽은 여성하원의원을 추모하며 여성 리더십에 대해 얘기할 수 있고 그걸 이렇게 많은 사람들(여성 뿐 아니라 남성들까지도!)이 경청한다는게 생경했다.

슬근슬근 걸어서 근처 빅토리아 앤 엠벵크먼트 가든으로 가 벤치에 앉아있는데, 비둘기들이 꾹구욱 꾹구욱 울고 볕이 좋아 사람들은 잔디에 드러누워 일광욕을 하거나 아예 엎드려 자고 있었다. 난 하도 움직이지 않아서 죽은건지 아닌지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다. 비둘기가 우는 소리는 신기하게도 우리집 근처에서 비둘기들이 우는 소리랑 같은데 꼭 다른 비둘기를 쫓아가며 울길래 아 이게 짝짓기때 내는 소리인가보다 했다. 앉아있는데 10대 여자아이들 두 명이서 쿠키인지 케잌 강매같은거 하려고 나한테 말걸었는데 미안해 얘들아 난 돈없는 여행자란다 딱봐도 이 좋은 날씨에 여기있는게 안보이니...내가 재차 거절하니깐 단 1페니도 없냐구 그래서 응 그래 해버렸다 안녕 결정적으로 너네가 들고있는 그게 맛이없어 보였어.


맛없어 보이는 디저트를 본 걸 만회하겠다는 생각으로 추천받은 가게에 갔다. 사보이호텔 바로 옆에 있는 멜바 앳 더 사보이 라는 가게인데, 나는 피치 멜바와 잉블 티를 시켰다. 역시 예상대로 맛있었다! 시간과 예산이 되면 여행기간에 또 가려고 했는데 아쉽게도 이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맛있게 멜바를 먹는데 어떤 남자가 들어오더니 점원언니에게 레퍼렌덤서 어디 지지하냐고 다짜고짜 물어보는게 아닌가. 난 솔직히 긴장해서 귀 쫑긋하고 있었다. 흔히들 가족과도 함부로 말하면 안되는게 정치, 종교, 섹스라고 하는데 아니 이걸 이렇게 쉽게 물어보나 싶었다. 예전에 아버지와 정치성향 때문에 한바탕 한 적도 있는 나라서, 더 긴장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예상대로 점원언니는 리메인이었고 남자는 아웃캠이었는데 각자 지지하는 이유 같은거 한두마디 얘기하더니 그래 오케이 바이 해서 더 놀랐다. 되게...주먹다짐이나 칼부림같은게 일어날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언성이 높아지는것 정도는 예상했었는데 신기한 경험이었다. 옆테이블에서는 두 사람이 이번 레퍼렌덤 관련해서 취재하기전에 앞서 조율할거 논의하고 있었는데, 보니까 일본쪽 방송사에서 취재하는것 같았다. 멜바 다 먹고 점원언니한테 맛있었다고 얘기하고 한밤개 하는 길구드 씨어터로 향했다.

또 길구드 씨어터 위치를 잘못알고 있어서 급히 지하철을 탔다.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은 이미 너무 유명해서 고민도 하지 않고 프로그램 북을 샀다. 내가 전에 알아본 바로는 닥터후 뉴 시즌 컴패니언으로 나오는 여배우가 한밤개에 나온다고 했는데, 그건 이번에 바뀐 캐스팅 전이었다. 역시나 프로그램 북을 찾아보니 그 이름은 없었다. 난 서클석 두번째 줄 11번을 예매했는데, 앞좌석의 사람이 머리가 너무 커서(...) 무대를 다 가려버려 내 옆에 빈자리에 앉아서 봤다.

연극은 듣던것보다 더 많이 멋졌다. 한밤개 소설을 그대로 무대에 옮겨놓은것만 같았다. 게다가 무대장치! 주인공 크리스토퍼의 내면을 표현하기도 하고, 이웃집들의 위치를 표현하기도 하고 엄마가 선물한 장난감 기차를 완성하면 런던으로 가는 기차가 완성되고. 배우들은 이웃 주민이 되었다가, 문이 되었다가, 런던 사람들이 되었다가 시시각각 변화하고 그걸 너무나도 멋지게 표현했다. 정말이지 이렇게 멋질수가 있나 싶기도 했다. 마지막에 크리스토퍼가 나와서 피타고라스의 직각삼각형이 왜 그런지 푸는것도 정말 좋았다.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 내 별점: ★★★★★

왠지 이 날은 보는 연극마다 관객매너가 별로라 휴가철인가 그런지 아니면 둘 다 정극이 아니어서 그런지 싶기도 했다. 아무튼 즐겁게 연극을 보고 집에 돌아와서 씻었다. 생각해보니 저녁에 마트라도 들렀어야 했는데, 연극이 끝나니 밤 10시가 훌쩍 넘어버려서 문 연 데가 없어서 할수없이 아까 남겨두었던 과일팩을 마저 먹고 잤다. 자기전에 1층 침대 사용하는 대만 룸메가 3층이 불편하면 자기 내일 체크아웃 하는데 내 자릴 쓰라고 말해줘서 고마웠다.


6월 23일 목요일(제3일)

일어나자마자 씻고 옷입고 데스크로 가서 1층 침대로 바꿀 수 없냐고 물어보니, 보니까 나는 10일치를 한데 끊었지만 하루 이틀만 묵는 사람들이 꽤 많은 모양이었다. 다 예약이 되어있어서 어쩔수가 없다고 하길래 그럼 어쩔수없지요~ 하고 조식 먹으러 갔다.

조식먹고나서 가방챙기러 올라가는데, 어제 저녁에 체크인한것 같아보이는 미국인 룸메가 날 보더니 '이 캐리어 네 거니?'라고 묻길래 그렇다고 답해줬다. 그러더니 '어제 이 캐리어 보고 주인의 취향이 꽤 마음에 드는걸'이라고 생각했다고ㅋㅋ특히 레드버블 스티커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 룸메는 나사 로고 티셔츠를 입고있었고! 왠지 친근해져 버렸다.

아침을 얼추 먹고 블소님네 가서 레퍼렌덤을 기념하기로 했다. 런던은 아침부터 비가 많이 내려서 남부지역은 물에 잠기기도 했다. REMAIN이 아니라 RAIN이라는 말도 있었다. 근처 시장에서 아보카도와 과일을 잔뜩 사고(과일은 마트보다 이렇게 바깥 매대에서 파는게 훨씬 저렴하다. 다음에도 오게된다면 꼭 레지던스로 와서 이런 과일들을 잔뜩 먹고 다녀야지 싶었다) 맛난 밥과 클로티드 크림을 잔뜩먹고 덕톡을 한 다음에 밖으로 나와 이층버스를 탔다. 

내리자마자 비가 잔뜩 내려서 우산을 적당히 쓰고 하원 굿즈샵으로 대피하듯 들어갔다. 들어가서 제일 마음에 들었던 빅벤 시계반 모양이 그려진 카드지갑을 샀다. 귀여워...

영국은 투표 당일날에도 홍보 전화가 가능하고 사람들이 공공연히 내가 어디를 지지한다는걸 표현해도 되어서 시내를 돌아다니는 동안 I'M IN이라거나 VOTED REMAIN이라는 스티커를 웃옷과 가방에 붙인 사람들을 정말 많이 보았다.

포트큘리스 하우스엔 프라이드 인 런던 기념인지 6색깃발이 걸려있었다. 국회의사당 부속건물, 의원실들이 모여있는 그 건물에 성소수자 지지하는 깃발이 버젓이 걸려있는거랑 같은거다. 빅벤을 보면서 새우 파스타 샐러드와 음료수로 저녁을 먹으며 오늘 레퍼렌덤 투표가 어떻게 잘 될지 그런것들을 얘기했다. 중간에 조 콕스 추모하는 의회 광장도 가고, 10번지 근처도 지났다.

템즈강변을 걷다가 물이 너무 고여있어서 못빠져나가고 있는데 그 빗물 잔뜩먹은 잔디 위에 개를 풀어놓고 공놀이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불어난 빗물 때문에 열차 운행이 지연되어 워털루역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뉴스에선 계속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우린 근처에 온 김에 포트넘 앤 메이슨에 들르기로 했다.

나는 부탁받은 차와 내가 마실 차를 사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주류 코너에서 술 시음도 했다. 나름 마음에 드는 진이 있었는데 20파운드라 좀 고민이 되었다. 여행 마지막 날까지 돈이 남으면 사야지 했는데 결국 사지못해서 아쉬웠다...포메 맞은편에 화과자 가게가 있어서 둘러보다 근처에 있는 카페네로 가서 각자 음료를 시키고 덕톡을 마저 한 다음에 헤어졌다. 저녁에는 커피를 못마시는 터라 나는 핫초콜릿을 먹었는데, 블소님의 말에 따르면 역시나 싶게 커피는 맛이 없었다고 한다. 

집에 가는 지하철역에서 앞사람이 가방에 REMAIN 스티커 붙이고 있었다. 지금 수첩을 보니 '자고일어나면 REMAIN이면 좋겠네'라고 쓰여있다...이렇게 1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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