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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K. 롤링과 좌파의 어둠J.K. Rowling and the darkness on the left by Nick Cohen (칼럼 번역)

평방미터 2018. 9. 27.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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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으로 롤링 까는 글인줄 알고(물론 롤링도 깝니다만은, 여전히 롤링에게 애정을 갖고 있는 해포 키즈 스펙테이터 기자가 쓴 칼럼인게 돋보임 그러나 내기니는 용서할수없다) 번역 시작했는데, 제레미 코빈과 현 노동당을 대차게 까는 글이어서 너무 놀라버림. 띵문 칼럼 고마워요, 닉 코헨!


출처 [x]

J.K. 롤링과 좌파의 어둠J.K. Rowling and the darkness on the left by Nick Cohen

2018년 9월 24일 그리니치 표준시 9:45 AM, 스펙테이터 커피 하우스


당신이 현대 문학에서 지미 나이트 같은 인물과 우연히 마주치기란 매우 드뭅니다. 그는 인종차별주의자고, 그 점은 그라는 사람을 참신하게 만드는건 아닙니다. 어쨌든, 인종차별주의자들은 할리우드에서 파인우드 스튜디오까지 문화산업의 전방면에 있어서 개탄받고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이 인종차별주의자에 대해 그의 전부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에 유대인과 관련된 거라면 난 나이트를 믿지 않을거야. 그는 그들을 싫어해. 지미의 말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모든 악의 근원이야. 시오니즘은: 난 그 지랄맞은 단어에 신물이 나.'


다시 한 번 현대소설에서 익숙하게도 나이트는 또한 성차별주의자입니다. 그가 자신의 여자친구를 때리고 그녀가 울자, 그는 좌파의 언어적 특권으로 그녀를 공격하며 대답합니다:


'오, 엿먹어, 그렇게 아프지도 않았잖아! 넌 피해자인척 하면서, 진짜 맞고사는 여자들의 위신을 떨어뜨리고 있다구.'


나이트는 J.K. 롤링의 최신 범죄소설 '치명적인 백색'에 등장합니다. 저는 이 정치적 성명을 지나치게 중시하고 싶지 않습니다: 롤링은 너어무나도 훌륭한 작가인 나머지 제 이야기를 멈추고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서 경건한 목소리로 설교하는걸 멈출 수가 없습니다. 많은 다른이들처럼 그녀가 자신의 개인 탐정과 그의 조수 사이의 좌절된 로맨스를 복잡하고 불가사의한 살인사건과 결합시켰다는 극히 평범한 이유로, 저는 그녀의 코모란 스트라이크 시리즈를 즐겁게 읽었습니다: 오직 영국에서만 만들 수 있는 상실한 기회와 억압된 감정의 희극인거죠.


그렇지만 롤링의 이야기들이 성공한 이유는, 바로 영국의 풍경과 긴장을 많은 '심각한' 작가들이 다루는 것보다 더 진정성있게 전달하는 소위 국정 소설이기 때문입니다. '치명적인 백색'은 2012년을 배경으로 노동당을 장악하려던 운동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당시에, 당신은 국제 앰네스티나 사회주의 노동자당에 대한 나이트의 비웃음을 들을 수 있었을 겁니다. 그들은 관타나모 만에 대해 항의하거나 모두를 짓밟은 미국 제국주의의 패배를 원인으로 하는 탈레반의 치명적인 여성혐오 지지자들과 동맹하지 말라고 경고한 여성들을 언급했었을 테니까요. 다르게 말한 사람은 누구든 미국의 편이었습니다. 그들은 백인 서부인이거나, 백인이 아니라면 '원주민 정보원'인 거죠.


오늘날 당신은 남성기를 가진 성전환자들은 여성의 안전을 위태롭게 만든다는 이유로 여성전용 공간 출입을 금지해야한다는 이들을 성전환혐오자 페미니스트들이라 비난한 좌파들로부터 다시 한번 그 비웃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모든 악의 근원이다'라는 믿음을 유지하는건 - 악조건과는 거리가 멀게도, 반유대주의 음모론에 대한 믿음은 당신에게 노동당의 지도력에 대한 자격을 줍니다.


롤링을 소중히 여기는 더 큰 이유는, 압도적으로 많은 예술가들과 작가들이 현대 좌파를 묘사하는 도전을 회피할 거라고 확실히 알고있는 바 때문입니다. 선전가들은 이를 신화화 하겠지만, 대부분은 그저 좌파 정치의 타락이 결코 일어나지 않은 척 할 테니까요.


해리 포터의 표현을 이용하자면, 문화적 좌파는 그들의 측면에 악함 따윈 없다는 개념에 부합해야 한다는 요구로 인해 저주받았습니다. 우파 언론인들도 브렉시트 쇼에 대한 그들의 우둔한 만장일치를 통해 같은 악덕을 보여주었고요. 예술가들은 데일리 메일 기레기들보다는 더 높은 수준의 작업을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이 기록들은 그들이 더 나은 건 아니라는 사실만을 보여줍니다.


희극인들은 소설가나 극작가보다 사건에 더 빨리 대응해야 합니다.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 부탁한 누군가는, '희극판은 씹같이 쪼막만한 세계야'라고 말하면서 클럽에 드나들거나 라디오4 채널을 듣는 이라면 누구나 아는 말을 했습니다: 대부분의 이들은 좌파의 어둠에 책임을 지지 않을거라는 사실을요.


돈을 지불하는 고객들을 계속 만족시키려는 신중한 부르주아들의 우려에 의해서만 그들이 동기부여를 받는건 아닙니다. 좌파나 진보적인 청중들이 원하는 당의 방침이 무엇인지 제게는 전혀 분명하지 않아 보입니다. 예를들어, 이번 여름의 에든버러 축제에서 금기를 깨려는 데 준비된 몇 안 되는 희극인 중 한 명인 맷 포드는, 진지한 표정을 짓는 유머를 준비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설명하더군요:


'코빈은 사업을 통제하려는 노동당 정부의 능력을 제한하기 때문에 EU에 반대합니다 - 그러니 그는 민족주의자입니다.


'그리고 그는 사업을 통제하고 싶어합니다 - 그래서 그는 사회주의자입니다.


'이를 전부 합치면 그는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자입니다... 저는 그저 유대인 공동체가 이 점에 대해 괜찮다고 했는지 그가 확인했길 바랄 뿐이네요.'


청중 몇 명은 항의의 의미로 퇴장했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남아서 이 관습을 거스르는 전율감을 즐겼습니다. 노동당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당의 노선 강령은 광범위한 좌파 집단보다는 파벌에 의해 정해지고 이를 뒤따라 가게 됩니다. 한 희극인은 중산 계급의 희극인들이 자유로이 말할 수 있는 개인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복종이 어떻게 발전하는지에 대해 그가 목격한 걸 묘사했습니다. 그는 2015년에는 대부분의 희극인들이 모호하게 에드 밀리반드가 총리가 되길 원하는 온건 좌파였다고 말했습니다. 코빈이 노동당 당수가 되었을 때, 그들은 그가 영국에 사회주의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생애 최고의 기회라고 판단했고, 그를 지지하는데 푹 빠져버렸습니다. 온건 좌파는 이제 '온건'하다 불렸고, 영웅 숭배에 대한 온건파의 굴복은 그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코빈에게 헌신적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코빈에 대한 비판을 입 밖에 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선의를 갖고 그들의 당수를 비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영국 좌파 대대로 익숙한 양식에 따라, 그들은 코빈이 '블레어라이트'[각주:1]들과 언론과 그리고 - 결국, 모든 음모 이론들이 종결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지요 - 유대인들에 의한 음모의 희생자라고 확신했습니다. 이른바 좌파의 기릴 만한 헌신이야말로 한때 쾌활하던 남녀들을 어둠속으로 끌고들어가게 한 원인인 겁니다.


제가 아는 희극인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희극이 집단 사고의 덫에 걸려버렸다고 말하니, 그들이 한 목소리로 말하더라: 집단 사고같은건 없다고 말야 - 그리고 그게 왜 웃긴지 그들은 모르더라고.'


당의 노선을 따르는 예술가들이 자신들이 훌륭한 대의를 위해 전념하고 있다고 믿는 것을 주목할 가치가 있습니다. 그들은 진심으로 좌파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자신과 그들의 청중들에게 가해지는 자기 검열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선전가처럼 생각하면서 품위 있는 일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만 - 브레히트가 이를 다루었지요 - 이는 대중에게 숨김없는 예술가들에 의해 거의 항상 교활한 거절이라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론적으로는, '헌신'이란 두 발로 펄쩍 뛰어올라 박수갈채를 보내며 환영해야할 단어 중 하나입니다. 헌신적인 사람들은 숭고한 투쟁에서 자신을 희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면에서 인류의 이기적인 대중보다 낫습니다. 실제로, 헌신적인 이들은 자신들이 더러운 비밀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요. 여러분들은 예술가나 작가가 '물론 나는 인종차별과 폭력이 권리에 국한되지 않는단 걸 확실히 알지만, 이걸 내 소설이나 영화에서 절대 인정하지는 않을거야. 왜냐면 이러한 지적 정직이 노동당이 집권할 수 있는 기회에 피해를 입힐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지.' 라는 취지의 말들을 하는걸 결코 들은 적이 없을 겁니다.


저는 미약하게나마 안심시키면서 그들의 은폐 욕구를 발견했습니다. 사람들은 영국을 집어삼켜버린 선전과 가짜 뉴스의 홍수들로 인해 우울해 할 권리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예술과 저널리즘의 선전가들이 여전히 그들이 누구인지를 발표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반면에, 작은 희망의 근거들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할 순간은, 바로 그들의 초조함이 사라지고 그들이 무엇이 되었는지에 대해 자유롭게 자랑할 때인 겁니다.


그 날이 올 때까지 그리고 그런 날이 오지 않는다면, 쓰여지지 않은 새로운 작품들이나 결코 부활할 수 없는 오래된 작품들의 배척이라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서 무엇이 언급되지 않고 언급할 수 없는지를 살펴봄으로서 여러분들은 좌파 문화의 변화를 가장 잘 기록할 수 있을 겁니다. 현대 노동당 지지자들의 말을 들을 때마다, 저는 1976년 데이비드 에드거의 연극 '데스티니'를 계속 떠올립니다. 데스티니는 에녹 파월의 울버햄튼 근처에 있는 웨스트 미들랜즈의 한 마을에서 치루는 보궐선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당시 국민전선의 영향을 받은 신파시스트 지도자가 그의 입후보자들에게, 유권자들에게 투기꾼과 파괴범들이 영국을 파멸시키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고 지시하지요: 그는 그런 투기꾼과 파괴범들이 유대인이라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후 제가 10대였을 때부터 함께 해온 이 파시스트 지도자는, 한 입후보자에게 만일 이민자들이 자기만큼이나 영국인이라는 말을 한다면 뭐라고 말해야 할 지 묻습니다. 이 입후보자는 승인된 답변을 즉시 제공합니다:


'고양이가 훈제 청어 상자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훈제 청어가 되는 건 아니지요.'


이는 심지어 그들과 그들의 부모, 조부모들이 여기에서 태어났다해도, 이민자들이나 이민자들의 후손들은 결코 진정한 영국인이 될 수 없다는 대중 정서의 현대적 반향에 부패가 얼마나 깊이 침투했는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이는 파시스트나 진에 쩔은 토리가 아니라, 바로 제레미 코빈에게서 나온 겁니다. 그는 의회에서 열린 회의에서 자신과 반대하는 주장을 펼쳤던 유대인에 대해서 '아주 오랫동안 - 아마도 평생 - 이 나라에 살았지만, 그들은 영어의 아이러니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금기시되는 주제를 다루려는 의지를 자랑하는 진지하고 헌신적인 예술가들 또한 진정으로 어려운 문제가 떠오르는 즉시 은폐를 위해 뛰어가지만요.




  1. Blairite, 1997년부터 2007년 까지 총리를 세 번이나 연임한 전 노동당 당수 토니 블레어와 그의 정책을 지지하는 이들을 가리킨다. 광범위하게는 신노동당(New Labour)이라 불리기도 한다. [본문으로]